보수가 기존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경향이라 할 때, 나라가 유지하려는 질서 그 자체인 헌법은 필연적으로 보수적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이는 헌법에 의해 구축된 그 질서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가지는 특이한 관점이다.
헌법을 처음 작성하는 사람들이 보는 관점에선, 헌법은 오히려 진보 그 자체이다. 왜냐하면 헌법은 태어날 당시에는, 기존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존 질서를 극복하는, 새로운 질서로서 제시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헌법의 독해는 늘 보수와 진보가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는 긴장 위에서 진행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이 줄다라기의 승자는 보수적 독해가 되는 경향이 생긴다. 헌법으로 유지되는 체제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세월은 누적되지만, 헌법을 처음 만들던 당시의 관점은 공동체의 기억 속에서 차츰 희미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느슨해진 줄로는 음악을 켤 수 없는 것처럼, 헌법의 원문에만 충실한 수동적 독해는 재미도 없고, 무엇보다 공허하다. 『헌법의 순간』은 제헌의회 속기록과 제헌의원들의 회고록을 비롯한 다양한 사료를 바탕으로, 우리가 헌법이 만들어지던 바로 그 순간으로 시간여행을 할 수 있도록, 그래서 헌법을 처음 만들던 당시의 관점을 우리가 다시 상기해 긴장감있게 헌법을 독해 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이러한 책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장으로 현행헌법 제 36조 (혼인과 가족생활은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평등을 기초로 성립되고 유지되어야 하며, 국가는 이를 보장한다) 를 다룬 제5장의 내용을 간략히 소개해보고자 한다.
최근까지도 다양한 판례에서 동성혼이란 개념은 인정되지 않았다. 헌법 제 36조에서, 혼인..은 양성의 평등을 기초로 성립.. 이라고 명시 되어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양성의 평등을 기초로 성립되는 것이 헌법이 인정한 혼인이라면, 동성의 혼인이란 성립 불가능 할 것 같다.
하지만 제헌 당시의 속기록을 보면 이러한 해석이 얼토당토 않음을 금방 알 수 있다. 애시당초 현행헌법 36조의 기원이 되는 제헌헌법 20조 (혼인은 남녀동권을 기본으로 하며 혼인의 순결과 가족의 건강은 국가의 특별한 보호를 받는다)는 남녀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여성의 평등을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해당 조항은 헌법 초안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헌법 초안이 여성문제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한다는 비판에서부터 논의가 시작되었다.
…이 초안이야말로 바람없는 타이어와 마찬가지요, 마개빠진 사이다와 마찬가지란 말씀입니다. 국민의 반이 여자입니다. 국민이라는 단어가 서른 한 번 언급되는 이 헌법에서, 1,500만명이나 되는 여자가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려 여자문제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건 이 헌법의 기초적인 착오라 생각합니다.
- 권태희, 제헌국회 회의록 제 1회 20호
우리가 진실로 해방과 남녀동등을 부르짖고 모든 것을 평등한 입장에서 민주주의적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이때, 새로운 헌법이 여성에 대해서는 하등에 이렇다 할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없습니다. (…) 여자가 한 인간으로 대우를 받지 못하는 모든 사회적 폐단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이때, 반드시 헌법이 한 가정 속 여성 지위를 보장해야 합니다. 결혼문제에서 배우자 선택은 여성의 동의로서만 비로소 성립되어야 할 것입니다. 재산권, 상속권, 기타 가족제도에서도 부부동등의 입장에 입각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표시해야 합니다. 이것은 벌써 다른 나라 헌법에도 명백히 표시되어 있는 것이올시다.
- 장면, 제헌국회 회의록 제 1회 21호
권태희, 장면의원등이 특히 문제를 삼았던 당시의 가장 큰 여성 문제는 무엇보다 축첩의 폐단이었다. 축첩이란, 첩을 쌓는다는 뜻으로, 남성이 아내를 여럿 두는 방식을 말한다. 첩으로 살게되는 여성을 애초에 해당 관계를 본인이 선택 할 수도 없을뿐더러, 해당 관계가 시작되면서부터 수많은 차별과 멸시를 받게 되고, 그로 인해 역으로 그 관계에서 벗어나 자립하기 힘들게되는 악순환을 겪게 되었다. 실제로 축첩 정치인 낙선운동, 축첩공무원 퇴출운동 등은 당시의 가장 큰 여성운동 중 하나였다.
따라서 제헌의회 의원들도 여성의 표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테고, 이러한 압박이 권태희, 장면의원등의 힘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거꾸로, 당장 제헌의회의 의원들 중에도 직간접적으로 축첩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을 것이므로, 이러한 여성계의 요구는 즉각적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권태희, 장면 의원등의 절절한 연설에도, 해당 조항의 가부를 묻는 투표는 66:61, 64:62 등으로 압도적 지지를 얻어내지 못했다.
그러나 권태희 의원이 외롭게 시작한 싸움에 하나 둘 다양한 의원들이 힘을 보태기 시작했다. 지금 중요한 사회문제가 노동자문제, 농민문제, 여성문제라고 할 때, 노동자와 농민문제에 대해서는 헌법이 대책을 내놓는데 반해 여성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는 균형론도 있었고, ‘우리 어머니들을 생각하자’는 감성론도 있었다. 다양한 각도에서 볼수록 여성에 대한 조항이 필요하다는데에 의견이 점점 모이기 시작했다.
… 또 국회 대의원 200명 중에 여자 대의원이 하나도 없다는 것도 역시 남존여비 사상의 결과라 하겠습니다. 여자 대의원 하나가 안 나왔다고 여자 문제가 얘기도 안 됐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유감된 문제인데, 이왕 거론 되었으니까 여러분께서 찬동하셔서 만장일치로 통과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 조희영, 제헌국회 회의록 제 1회 25호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수많은 토론과 설득을 통해 추가된 조항이 바로 혼인은 남녀동권을 기본으로 하여... 국가의 특별한 보호를 받는다 는 조항이다.
이 맥락을 알고 읽었을 때, 이 조항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남녀’동권이 아닌, 남녀’동권’ 임을 우리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혼인 자체가 여성에게 불리하게 성립되고 유지되고 있기에, 이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 현행헌법 36조의 정신인 것이다. 이런 조항을 기계적으로 해석하여 동성 부부는 남녀가 아니므로 국가의 보호를 받는 혼인을 이룰 수 없다고 읽는다면 이는 이 헌법 조항과 그 헌법을 입법한 제헌의원들에 대한 모욕이겠다.
이 밖에도 책 『헌법의 순간』은 의무교육, 신체의 자유, 정교분리, 이익균점권, 양원제와 단원제 등 지금 이 순간에도 사회갈등의 핵심이 되는 문제들에 대하여 제헌당시 얼마나 심도있게 논의되었고, 또 지금의 상황이 얼마나 예견되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두 번의 군사정변도, 대통령과 의회가 불화하며 어떤 기능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작금의 정치 상황도, 노동자가 일방적으로 사용되고 해고당하는 노동 상황도, 의무교육과 무상교육의 범위를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한사코 제한하려는 교육 상황도, 얼마나 그 당시에 논의되고 예견되었는지, 책을 읽는 내내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물론 그 당시 예상했던 문제들이 지금 실제로 현실화된 이 와중에, 제헌의원들이 그 당시에 헌법을 제대로 만들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원망을 가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거꾸로, 이런 선구안을 바탕으로, 헌법 초안에 대해 토론할 수 있도록 허락된 20여일의 제한된 시간 안에, 어떻게 해서든 불완전할지언정, 그 상황을 냉소하지 않고 그들이 할 수 있었던 최선의 설득과 타협을 마지막까지 밀어붙여 그들이 만들 수 있던 한도 내의 최선의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그 과정이야말로 민주주의를 살아가는 시민으로서도, 하다못해 제한된 자원으로 성과를 내야하는 회사원으로서도 충분히 음미할 가치가 있는 멋진 사례였음을, 『헌법의 순간』은 절묘하게 드러낸다.
『헌법의 순간』은 다양한 사료와 따뜻한 부연설명으로 독자가 이 정치의 향연을 충분히 음미할 수 있도록 돕는 훌륭한 식기가 되어주었다. 책은 단순히 속기록을 나열하는데 그치지 않고, 약간의 상상력을 더해 그 속기록 속의 의원들의 표정과 몸가짐까지 우리가 정말 그 회의장 안에 있는 것처럼 착각 할 수 있도록, 생생하게 당시의 분위기를 재현해낸다. 헌법을 다루는 책이라 해서 어려운 법률용어의 숲에 표류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접어두어도 좋다. 다만 권하고 싶은 것은, 책을 읽기 전 충분한 시간을 확보해두는 것이다. 아마 한 번 책을 들면, 중간에 그만두기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