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Duplicate
♻️

지라를 활용해 결혼 준비하며 배운 것

Created
2020/10/28
Tags
Retrospect
Agile
2020년에 결혼하기란 정말 어려웠습니다. 코로나로 인해서 포기해야 하는 것들도 많았고, 심하게는 포기해야 하는지 아닌지가 변동되는 것들도 많았죠. 그런 와중에도 큰 물의나 갈등 없이 결혼식을 마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저희가 결혼이라는 프로젝트를 지라를 통해 효율적으로 관리했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제가 지라를 통해 결혼을 어떻게 관리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것들을 배우게 되었는지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결혼은 사실 지라로 관리하기 딱 좋은 프로젝트

지라를 사용할 때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은 티켓을 만드는 일입니다. 그런데 티켓은 가급적 “미리 한 번에” 만들어서 모두 백로그로 만들어 놓는 것이 이상적입니다. 그래야 “프로젝트 전체에 걸쳐 해야 할 일”의 규모가 파악 될 수 있고, 그에 맞추어 일정을 산정하는 것이 가능해지기 때문이죠.
그런데 “미리 한 번에” 티켓들을 만들어 놓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다 보면 예측하지 못했던 이슈(티켓)가 튀어나오기 마련이고, 그렇게 계획했던 일정에는 오차가 발생하기 마련이죠. 그렇기 때문에 프로젝트 일정을 산정 할 때는 반드시 이런 변수가 있을 것을 예측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예측”하는 부분이 일정 산정 및 프로젝트 관리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입니다.
그런데 결혼이라는 프로젝트에서는 바로 이런 “예측”이라는 것이 상대적으로 쉽습니다. 정말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결혼식을 계획하고 있다면 이야기가 또 다를 수 있지만, 대부분은 “결혼 준비 체크리스트”라는 키워드로 검색하면 나오는 체크리스트들에 있는 태스크들에서 해야 할 일이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기호에 따라 몇 가지를 추가하거나 생략하는 정도지요. 따라서 “최초에 만들어 둔 태스크들만 잘 관리”하면 나중에 “헛 뭐야 이것도 챙겨야 하는 거였어? 큰일났다 이제와서 이걸 어떻게 한다?” 같은 상황이 잘 발생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결혼은 “예측성”이라는 차원에서는 간단한 프로젝트이지만, “의존성”이라는 차원에서는 복잡한 프로젝트입니다. 예컨대 “포토테이블 세우기”, “웨딩촬영”, “턱시도 맞추기”, 반지 맞추기”, “청첩장 만들기”, “다이어트 하기” 등의 여러 태스크들은 얼핏 서로 독립적인 일 처럼 보이지만, 밀접한 의존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컨대, 포토테이블을 만들려면 사진이 있어야 하고, 사진을 찍으려면 턱시도를 맞춰야 하고, 턱시도를 맞추려면 다이어트를 해야 합니다. 결혼반지 맞추기는 대부분 독립적으로 진행 할 수 있지만 웨딩촬영 전까지는 완료되어야 하고요. 또 모바일 청첩장에도 웨딩촬영 사진이 사용되기 때문에 촬영은 청첩장을 만들기 전 까지 촬영 및 인화가 완료되어야 합니다.
즉 태스크들 사이에 선후관계가 있을 수 밖에 없고, 어떤 태스크들은 무조건적으로 맞춰야 하는 Deadline이 있으므로 이 모든 것을 고려해 일정을 짜야 합니다.
이런 의존성을 표시하고 시각화 하는데, 지라는 굉장히 탁월한 도구였습니다. 아래 사진은 저희가 결혼에 필요한 주요 태스크들을 몇 개의 에픽으로 나누고, 각 에픽의 관계를 “depend on” 등으로 표시한 뒤, 해당 내용을 Roadmap으로 확인했을 때의 모습입니다.
순서대로 해야 할 태스크들과 병렬로 진행 가능한 태스크들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태스크들의 의존성을 잘 관리하면, “미리 걱정” 할 일이 없어집니다.

위 그림에서 표현되는 의존성은 얼핏 복잡해 보이고, 이런 의존성을 머리에 담고 있는 것이 힘들어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이렇게 의존성이 명확하게 되면 한 번에 머리에 담아야 하는 정보는 훨씬 줄어들게 됩니다.
예컨대 제가 다이어트를 하고 있을 때는 포토테이블이나 스튜디오 촬영에 대해 전혀 신경쓰지 않아도 됩니다. 다이어트가 끝나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으므로, 다이어트 기간에는 “오직” 다이어트에만 신경 쓰면 됩니다. (물론 바로 다음 에픽인 “양복맞추기” 정도는 머리에 넣고 있어야 겠지요 )
결혼준비를 하면서 다투는 커플들이 많다고 하는데, 그 원인 중 하나는 “조바심”이 아닐까 합니다. 다이어트를 하고 있으면서도 스튜디오 촬영과 포토테이블 걱정을 하게 되면, 걱정 자체가 많아질 뿐만 아니라, “내가 뭔가를 놓치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조바심이 생길 수 밖에 없지요. 그러다가 자칫 정말로 뭔가 놓치기라도 하면 “내가 이것 신경 쓸 동안 당신은 왜 이런 것을 놓쳤냐”라면서 상대방 탓을 하게 되는게 결혼식 준비중 생기는 다툼의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가 아닐까 합니다.
지라를 통해 의존성을 한 눈에 확인하고, 특정 기간 내가 전념해야 할 것들이 파악되면 이런 조바심에서 해방 될 수 있고 훨씬 건강한 마음가짐으로 파트너와 계획을 논의 할 수 있습니다.

오너십을 나누면 걱정 거리가 줄어듭니다.

지라의 티켓에는 담당자라는 항목과 협업자 라는 항목이 있습니다. 결혼준비의 여러 태스크들은 부부가 함께 준비해야 하는 것들이 있는 반면, 신랑신부 각자가 전담해야 하는 태스크들도 많습니다. 예컨대, 제가 양복을 맞추는 일은 제가 전담해야 하는 일이고, 부케를 고르는 일은 신부가 주도해야 하는 일이지요. 상견례 자리를 고르는 일은 한 쪽이 진행하되 서로 협업해야 하는 일이고요.
여러 개의 할 일들의 진행상황과 디테일을 모두 내 머릿속에 정리 할 수는 없습니다. 이걸 시도하려다가는 조바심의 함정에 빠지게 될 수 있습니다. 위임할 수 있는 태스크를 정리하고 그 태스크들을 확실히 위임해 내가 신경써야 되는 분야를 줄이는 것 역시 프로젝트의 복잡성을 관리하는 중요한 방법이었습니다. 나아가 배우자를 신뢰하고 신뢰를 쌓는 방법을 연습하는 차원에서도 매우 훌륭한 방법이었지요.

정기적으로 멈춰서 우리가 맞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이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에 신경 쓰지 않기”가 프로젝트의 복잡성을 관리하는 핵심이지만, 그렇다고 완전 관심을 끊어버리게 되면 틀림없이 난처하게 되는 경우가 생깁니다. 상대방에게 위임한 태스크가 잘 진행이 되었는지, 또는 방역단계가 변화하게 됨에 따라 미래의 에픽에 변동사항은 없는지 주기적으로 관찰해야 합니다. 이렇게 변동 사항에 민첩하게 (Agile) 대응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계획과 회고입니다.
저희는 1주일마다 우리의 일정에 변동사항은 없는지, 있다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를 논의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신경 써야 할 것”들에 신경을 계속 못 쓰게 되는 상황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예컨대 다이어트가 진행 중일 때는 양복을 맞추는 일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다이어트가 끝나는 당일에 양복점을 예약하려고 보면 막상 원하는 양복점의 예약이 모두 차 있을 수도 있는 노릇입니다. 따라서 다이어트 에픽이 끝나기 2~3주 전에는 양복점이라는 다음 에픽의 태스크들을 구체화 하는등의 계획회의를 하기도 했습니다.
계획에 비해 회고는 상대적으로 소흘했던 것 같고 이 부분은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정기적으로 회고를 하고 이를 기록으로 남겼더라면, 더 나은 의사결정은 물론 서로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될 수 있는 기회 였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사실 특정 에픽이 끝나게 되면, 한동안 이를 대화 주제로 삼게 되기 때문에 별도의 회고를 가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예컨대 상견례가 끝나게 되면 각자의 부모님과 그 상견례 자리가 어디가 어떻게 좋았다더라 하는 이야기를 꽤 오래 나누게 되죠. 어떤 의미에서는 회고를 한 셈이지만, 그 대화 내용을 기록으로 남겼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아쉬움: 회사에서 쓰는 도구와는 별도의 도구를 쓰자

사실 지라로 결혼식 프로젝트를 관리하기로 했던 것은, IT업계로 이직을 하게 된 아내에게 지라의 활용법을 가르쳐주고자 하던 목적이 가장 컸습니다. 그런 목적이 있지 않았다면 유료로 써야했던 지라를 고르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특히 지라를 프로젝트 관리 툴로 쓰는데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는데, 바로 회사에서 지라를 쓸 경우 충돌이 발생 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예컨대 지라를 최대한 잘 쓰기 위해서는 새로운 변경사항이 생길 때마다 즉각적으로 모바일 앱에서 티켓을 만들거나 최신화 하는 것이 중요한데, 이미 회사 계정으로 해당 앱에 로그인이 되어 있기 때문에, 결혼 프로젝트에 새 태스크를 추가하려면 지라 앱에서 로그아웃 및 로그인을 새로 해야하는 등의 번거로움이 있었습니다.이런 번거로움이 반복되자 프로젝트 말기에는, 그냥 iOS 기본 노트앱에 처리해야 할 일들을 공유하는 수준으로 프로젝트를 관리했습니다.
만약 제 글을 읽고 이를 참조해 결혼등의 사이드 프로젝트(?)를 관리하고 싶으신 분들이 계시다면, 모쪼록 회사에서 쓰는 툴과는 별도의 툴을 최대한 활용하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노션이나 트렐로에서도 무료 플랜으로도 지라와 동일하거나 그에 버금가는 수준의 프로젝트 관리는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결론: 복잡한 도구는 조금 간단한 프로젝트에서 사용하며 길들이면 좋다

지라는 그 자체로도 복잡하지만, 사용되는 환경도 복잡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각 티켓의 여러 속성들을 최대한 활용해 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그저 “할 일 목록 앱”처럼만 쓰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매일매일 정신없이 새로 생기는 이슈들을 해치우는 와중에 지라의 여러 기능들이 어떤 식으로 쓰일 수 있는지 알아보기란 쉽지 않지요.
결혼이라는, “예측성” 차원에서는 간단하면서도 “의존성” 차원에서는 복잡한 프로젝트를 지라로 관리하면서, 지라의 여러 기능들을 더 찬찬히 둘러 볼 수 있었음은 물론이고, 특히 회사 일을 하면서는 좀 처럼 만날 일이 없는 “기본 템플릿”등을 사용하면서 이 소프트웨어가 스스로 “어떻게 쓰이고 싶어 하는지”를 좀 더 잘 알게 되었습니다.
지라 뿐만이 아니라, 다른 복잡한 도구를 사용 할 때에도, “분명 이것 보다는 더 많은 기능들이 있을 텐데 왜 나는 맨날 쓰는 기능 밖에 쓰지를 못할까?” 싶은 도구들이 있다면, 이렇게 회사 바깥에서 조금 더 단순한 맥락에서 사용해보면 비슷한 효용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