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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사람들은 우리 앱을 못 쓴대요”라는 버그의 심각성은?

Created
2020/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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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접근성 지원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반응이 있습니다. “접근성 지원, 좋죠. 그런데 지금은 당장 돈을 벌어야 해요. 장애인들을 위해 추가적인 고려를 할 여유가 없습니다” 와 같은 반응이지요.
언뜻 일리 있어보이는 말입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런 답변에는 장애인에 대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오해와 차별이 숨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접근성 지원이 더 복잡한 코드로 이어진다는 오해

적지 않은 분들이 “접근성”을 고려해 개발한다고 할 때 다음과 같은 코드를 연상하는 것 같습니다.
if 장애인 == true { /// 장애인을 위한 특별한 처리를 하는 코드 else { /// 비장애인을 위한 코드 }
Swi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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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의 if문 분기처리가 많아지면 코드의 복잡도가 올라가고 이는 관리하기 어려운 제품으로 이어진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접근성을 지원하다보면 기존보다도 더 간결한 코드가 만들어지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접근성 지원, 개발자의 빠른 성장을 도와줍니다“라는 글에서도 다룬 적이 있습니다. 위 글의 핵심만 간추리자면, iOS, Android, Web등 모든 플랫폼에서는 UI관련 API들을 만들 때 모두 접근성 지원을 염두에 두고 만듭니다. 그런데 접근성 지원이 고려된 API를 활용해 만든 제품에서 접근성 지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그 API를 의도에 맞게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지요. 거꾸로 접근성을 고려하며 제품을 만들다보면 자연스럽게 해당 API들을 그 의도에 맞게 쓰게 됩니다. 따라서 불필요한 코드가 줄고 더 간결한 코드가 나오게 됩니다.
접근성 지원이 어렵다면, UI관련 API를 사용하는 Best-Practice를 알기가 어려운 것이지, 결코 접근성 지원이 코드의 복잡도를 높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거꾸로 말해, 여러분의 제품에서 접근성 지원이 잘 되고 있지 않다면, 코드의 복잡도를 개선할 수 있는 여지가 굉장히 많이 숨어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267만명이 앱을 못 쓰는 버그, 방치 하실 건가요?

여러분이 서비스하는 앱에 어떤 문제가 있어서 대구 사람들은 아예 쓸 수 없다고 해봅시다. 이 문제의 심각성은 어느 정도 일까요? 아마 어떤 서비스를 하고 있더라도 이런 문제가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새벽중에라도 당장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일 것입니다. 회사에서는 문제가 해결되면 공지사항도 올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사과문도 올릴 수 있겠지요.
그런데 이 문제가 오래 방치된다면 분명 대구분들의 분노에 넘치는 문의들이 들어올 것입니다. 아마 이런 형태이지 않을까요?
이 앱 대구에서만 안 된대요. 정말 어이 없어서. 대구 사람들 차별하나요? 왜 대구에서만 안 되는 것이지요? 서울 사람들은 이 앱으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한다는데 왜 대구 사람들만 못하게 해요? 대구사람들은 XX도 하지 말라는 것인가요?
이런 리뷰들이 앱스토어에 쌓이면 회사가 아무리 가치있는 임팩트를 전달하려 한다 해도, 그 진정성이 고객에게 전달 될리가 없습니다. 시중에서는 “대구 사람들 차별하는 앱”으로 통용될 것이고, 심지어는 대구 사람들로부터 법적인 소송이 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일이 장애인들에게 일어난다고 하면 그 심각성은 훨씬 낮게 취급됩니다. 2017년 기준으로 국내 장애인 인구는 약 267만명 정도입니다. (참고: 2017년 장애인 실태조사) 웬만한 광역시의 인구 정도이지요. 대구 사람들이 우리 앱을 못 쓴다고 하면 문제라고 생각하고, 장애인이 못쓴다고 하면 문제라고 여기지 않는 것. 바로 차별입니다.

장애인이어서 차별받는 것이 아니라, 차별받기 때문에 장애인입니다.

흔히들 장애는 의료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아주 오랜 기간동안, 장애를 의료적 관점에서 정의한 “의료적 모델”이 장애를 바라보는 기본 시선이었습니다.
1980년에 세계보건기구가 발표한 국제손상장애핸디캡 분류(International Classification of Impairments, Disabilities and Handicaps, ICIDH)는 장애에 대한 최초의 국제적 정의인데요, 이에 따르면 장애인이란
어떤 사람의 몸에 손상이라고 간주 될만한 이상이 있어서 (손상)
무엇인가를 할 수 없게 된 상태에 빠져(장애)
사회적으로 불리한 처지에 놓인 사람(핸디캡)
으로 정의됩니다. 즉, “손상”이 있어서 “장애”가 생기고, 그에 따라 “차별”이 따라온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모두 머릿속에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던 장애의 개념을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정리한 정의처럼 보입니다.
예컨대 이 정의에 따르면, 시각장애인이란,
눈에 문제가 생겨서(손상)
스마트폰을 볼 수 없어서(장애)
앱에서 제공하는 서비스에 접근하지 못하는 사람(핸디캡)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똑같은 시각장애인인데, 어떤 앱은 쓸 수 있고 어떤 앱은 쓸 수 없습니다. 시각의 손상이 문제의 원인이라면, 시각장애인은 언제든 앱을 쓸 수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앱은 쓸 수 있고 어떤 앱은 쓸 수 없다면, 문제의 원인은 “시각장애인이 쓸 수 없는 앱”에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여기서 “아니, 시각장애인이 앞을 못 보는데 앱을 어떻게 써?”라는 의문이 드시는 분이 계시다면, 이 영상, 또는 이런 영상(한국어)들이 참고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비슷한 사례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예컨대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사람들은 “청각장애인”으로 분류됩니다. 즉
귀에 문제가 생겨서(손상)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수 없어서(장애)
대화가 어려운 사람(핸디캡)
으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청각장애인들끼리 있을 때, “대화가 어려운 사람”은 없습니다. 청각장애인들은 그들끼리 수어를 통해 원활하게(청각장애인이 모두 수어를 한다는 생각도 사실은 편견입니다만) 소통합니다. 청각장애인이 의사소통을 할 수 없을 때는, 오직 청인이 청인의 언어로만 대화를 걸어올 때입니다. 생각해보면 한국어를 모르는 영국인과 영어를 모르는 한국인간에 대화가 되지 않을 때, 보통은 그 원인을 “둘 중 누구도 서로의 언어를 모르는 상황”이라고 생각하지 둘 중 한 사람에게 문제의 원인이 있다고 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유독 청각장애인과 청인의 대화에서 문제가 생길때만 우리는 청각장애인의 청각이 그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의사소통이 잘 안 되는 순간은 일상생활 속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는 그럴 때마다 통역사를 고용하던, 번역앱을 쓰던, 그림을 그리던,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 의사소통의 단절을 극복합니다. 그런데 청각장애인에게는 그런 노력을 기울이는 대신 청각장애인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청각장애를 “고치거나 극복할 것”을 강요합니다.버스를 타기 어려운 순간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큰 짐을 가지고 있거나 불편한 옷을 입었을 때, 우리는 버스의 계단을 오르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럴 때 조금씩 짐을 나눠들거나 서로의 손을 잡아줌으로써 버스를 탈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만약 버스가 40대 남성들은 타기 어려운 형태로 만들어졌다면, 이런 부분을 개선한 버스가 나와야 한다는 목소리가 뉴스에서 매일 다루어졌을 것입니다.지체장애인이 버스를 탈 수 없는 것은 그들의 신체가 버스에 알맞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장애인을 “우리”의 일부로 여기지 않고, 그들을 배제한채 버스를 디자인하고 운용하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은 버스를 타지 않아도 된다”는 암묵적인 차별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신체의 손상이 곧 행동의 불능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행동의 불능은 그보다는 사회적인 차별 때문에 생깁니다. 이렇게 장애(disability)의 원인이 사회에 있다고 보는 관점을, “장애의 사회적 모델”이라고 합니다.

특별한 케이스, 평소에 대응 안하시나요?

여기까지 읽고나서도, 제 글이 억지스럽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 같습니다.
“장애라는 것은 소수의 특수한 문제가 아닌가? 그렇게 특수한 경우까지 모두 헤아려가며 제품을 만든다면, 도대체 어느 세월에 제품을 만들 수 있단 말인가? 그걸 못한다고 누군가를 차별한다고 말 할 수 있나?” 와 같은 반응이 그 대표적 예시일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장애”와 연결지어서 따라오는 단어에는 “특수, 특별”와 같은 단어들이 있습니다. 장애아동을 가르치는 교육은 특수교육이고 그런 아동들이 있는 반은 특수반이었지요. 그렇게 “특수”한 사람들을 우리 사회는 “일반”적인 사람들과 늘 분리해 왔습니다. 그래서 장애인은 “우리와는 뭔가 다른, 또는 상관 없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깊이 박힌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세상에 “일반적인”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애초에 “일반적”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서울에 사는 2~30대 군필 남성 대기업 직장인 정도면 일반적인 걸까요?농담처럼 말했지만, 실제로 많은 제품들이 서울사는 2~30대 군필 남성 대기업 직장인을 대상으로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성인 남성들에게는 무해하지만(괜찮아보이지만) 유아에겐 치명적인 가습기 살균제가 팔리고, 군대용어가 마케팅 용으로 쓰이고, 노인들이 보기에 너무 작은 글씨로 메뉴판이 만들어지고, 영어를 모르는 사람은 알아볼 수 없는 화장실 간판이 나오고, 프리랜서 처럼 주기적인 수입이 없는 사람들이 고려되지 않은 정부정책들이 나오고, 태풍이 와도 “서울을 비켜가서 다행이다”라고 말하는 뉴스가 만들어집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전국에 2~30대 군필 남성 대기업 직장인이 몇 명이나 될까요? 성공적인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 정말 이런 배경을 가진 사람만을 신경쓰면 되는 것일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기획자와 디자이너, 개발자들은 새로운 “엣지케이스”가 나오면 이것에 대응하려고 하지 무시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시골에서 너무 느린 네트워크 환경에서도 앱을 쓸 수 있도록 만들고, 다른 로케일을 쓰는 고객의 앱에서 크래시가 나면 그것을 고치고, 샤오미 폰에서만 UI가 깨지면 고치고, iPhoneSE에서만 어떤 버튼이 가려지면 그것을 보이게 하고, 어떤 화면에 들어갔다 나온 유저에게만 네비게이션바 타이틀이 숨겨진다면 화들짝 놀라며 핫픽스를 합니다.
이런 사례가 아니더라도, 아마 제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버그”라는 것이 나올 때, 보통 그것은 “일반적인 사용 사례”에서 재현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만약 그랬다면 제품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발견 되었겠지요. 그렇게 나중에 발견된, 특수한 상황에서만 발생되는 버그들을 “특수하다”는 이유로 무시하는 사람은 전 아직까지 만나 본 적이 없습니다.
즉, 우리가 장애인의 사용사례에 대해 대응하지 않는 것은 장애인이 “특수”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늘 특수한 사례들에 대해 대응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장애인의 사용사례에 대응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그들을 “우리와 상관 없는 사람, 챙기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들이라고 차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차별을 하고 있다는 불편한 진실

내가 누군가를 차별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듣는 것은 분명 기분 나쁜 일입니다. 누구도 스스로 원해서, 또는 의식하면서 다른 사람을 차별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도들이 성소수자를 차별 할 때, 남성 면접관이 여성 지원자를 차별 할 때, 서울 방송이 지방의 재난을 무시 할 때, 백인들이 “흑인들의 범죄율이 높은 것은 사실”이라고 할 때, 그들 누구도 그것이 “나쁜 줄 알지만” 차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도들은 “성소수자들이 죄를 지을까봐 가여운 마음에”, 남성 면접관은 “지원자가 여성의 행복을 찾았으면 해서”, 서울 방송은 “당연히 서울이 제일 중요하니까”, 백인들은 “동네의 치안을 위해” 자기도 모르는 새에 차별을 합니다.이런 종류의 차별들은 무지에서 옵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성정체성이 있다는 것,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사회에서 인정받기를 원한다는 것, 지방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 흑인의 범죄율이 높은 것은 흑인들이 취업이나 진학에서 많은 차별을 받아 충분한 보수를 받는 직업을 가지기 어렵기 때문이라는 것 등등을 알지 못하거나 인식하지 못할 때 차별은 시작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다양한 IT인력을 양성하는 많은 교육과정들에서 접근성 지원에 대한 부분이 충분히 다뤄지지 않거나 아예 다뤄지지조차 않는 현실이라고 봅니다. 전문인력으로 양성되는 교육과정을 거치면서도 접근성 지원을 전혀 “배워야 할 것”으로 인식조차 하지 못한채 해당 과정을 수료하고 필드에 나가 업무를 수행하고 경력을 쌓고 연봉을 높이면서도 아무도 주변에서 “내가 뭘 놓치고 있는지”에 대해 말하지 않으니, 장애인에 대한 고려를 할래야 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이 글을 읽기전까지, 당신이 장애인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제품을 만들고 있었다면, 당신은 장애인을 차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당신만의 책임만은 아닙니다. 장애인들을 특수반에 몰아넣은 학교, 장애의 “극복”을 감동적으로 그린 TV 방송, 접근성 지원이란 개념을 가르치지조차 않은 교육과정들, 그 외 수많은 사회적 장치들에 대부분의 책임이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 글을 읽고난 이후에는, 전 여러분이 좀 더 불편 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까지는 몰랐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차별을 하고 있었다면, 지금부터라도 우리가 누군가를 차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 차별이 지속되지 않도록 각자의 위치에서 조금씩이라도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나섰으면 좋겠습니다. 지금까지는 우리가 위에서 언급한 사회적 장치들 때문에 무지 할 수밖에 없었다면, 이제는 우리가 그 사회적 장치들을 만드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인지하고 이를 개선해 나가야 합니다.
IT, 즉 정보기술은 정보접근성을 향상시키는 것이 가장 큰 존재 이유입니다. 특정 대학교 도서관에만 있던 자료를 전세계 어디에서든 접근 할 수 있도록 만들었기에 웹이 위대한 것이고, 그 자료를 지하철에서도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들었기에 스마트폰이 혁신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정보 접근성이 특정 부류의 사람들에게만 높아지는 것은, 거꾸로 그 특정 부류 바깥의 사람들에게는 큰 차별이 됩니다. 우리에게는 그 차별을 허물어낼 수 있는 능력과 책임이 있습니다. 이 책임을 우리는 방기 해서는 안 됩니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