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싹』에서 대부분의 인물들은 상당히 전형적입니다. 전광례, 오애순, 권계숙, 부상길, 양금명.. 그들의 스토리의 뭉클함과 별개로, ‘이런 인물들은 처음봤다’ 싶은 인물은 없습니다. 딸을 위해 헌신하는 어머니, 며느리를 시기하는 시어머니, 권위적인 가부장, 기대를 한 몸에 받는 맏이…
모두 우리 주변에 있을 법한 인물들입니다. 이런 『폭싹』에서, 유일하게 튀는 인물이 딱 한 명 있습니다. ‘그 때, 우리 주변에 저런 사람이 있었나?’ 싶은 사람 말입니다. 모든 등장인물이 전형적인 와중에, 그렇지 않은 등장인물이 한 명 있다면,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그 사람이 아닐까요?
그 사람은 물론 관식입니다. 고부갈등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끝내 아내의 편이 되는 남편. 하지만 자신을 과시하지 않는 남자. 자신의 아내가 빛나는 사람임을 아는 사람. 자기보다 아내가 빛난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하는 사람. 그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묵묵히 해내는 사람. 그래서 사실 드라마에서도 자주 보이지도, 그 대사가 자주 들리지도 않았지만, 드라마가 막을 내렸을 때 가장 생각나는 사람.
그런 면에서, 『폭싹』은 새로운 남성상을 제시하는 드라마라고 생각합니다. 가족을 위해 희생을 해서 큰 업적을 일궈내는 아버지가 아닌, 자신을 낮추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남편 말이지요.
하지만 여기에만 그친다면, 역시 『폭싹』은 ‘가족주의 판타지’와 같은 층위의, ‘이상적 남성상 판타지’에 머물렀을 것입니다. 하지만 『폭싹』은, 굳이 광례-애순-금명 3대의 시대극이라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우리가 겪어보지 못한 남성인 관식과 함께 다시 찬찬히 훑어보는 지난 60년은, 우리에게 뭉클한 감동과 함께, 서늘한 질문을 마주하게 합니다.
‘어쩌면, 우리 할머니, 어머니, 이모들도, 애순과 같이 빛나는 사람들이었던 것은 아닐까? 그들에게도 시인이 되고 싶었던 꽈랑꽈랑했던 여름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가, 우리 아버지나 할아버지나 삼촌들이 관식과 같았다면, 과연 우리 주변의 여성들의 지위는 지금과 같았을까? 이제서야 글을 겨우 배우는 할머니들의 삶에, 우리 남성들이 지은 죄의 크기는 얼마나 되는가.’
저는 결국 『폭싹』이 말하고자 했던 핵심 주제는 이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우리 대다수는 양관식이 아닌 부상길의 삶을 살았을까. 왜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을까. 언제쯤이면 부상길의 삶을 벗어날 수 있을까.
『폭싹』의 기분나쁠정도로 전통적인 가족주의 연출은, 어쩌면 우리가 마주하기 버거운 이 질문을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대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위장용 장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나아가, 이 한 질문을 강조하고, 또 돋보이게 하기 위해, 다른 모든 분야에 있어선 최대한 전통적인 시선, 전통적인 연출, 전형적인 설정을 유지했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폭싹』의 한계는, 주제의식을 강조하기 위한 도구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시도가 상당히 성공을 거뒀다고 봅니다. 적어도 제게, 『폭싹』은 뭉클하고 달콤한 과거의 회상이 아니라, 서늘하고 날카로운 내일의 나를 향한 채찍으로 다가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