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식민지배가 끝나자마자 한반도에는 38선이란게 생겼고, 이어서 한국전쟁이 벌어졌고, 이어서 휴전선이 생겼다. 그 동안 한반도에 살던 사람들은 아주 많은 걸 잃어버렸다. 먼저 밥을 빼았겼고 그 다음엔 밥그릇을 빼앗겼다. 그 다음엔 가족을 빼았겼다. 그 사이에 품위, 존엄, 아름다움 같은 것들도 어느 순간 잃어버렸다.
학교에서는 이러한 식민지배의 잔혹함과 동족상잔의 비극에 대해 꽤 큰 비중으로 가르쳤지만, 실제로 내 삶 속에서 그 무엇하나 빼았겨본 적 없는 나는 그 비극을 내것으로 여길 수 없었다. 그것은 나열된 사실들이었고 염료가 번진 흐릿한 흑백사진들이었다.
"부심이의 엄마생각"은 백기완 선생의 자전수필이다. 선생이 유년기 및 청소년기를 보낸1940~5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당연히 이 때 벌어진 민족의 아픔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그저 그 아픔들을 묘사하고 나열하는데 그치지 않았다. 이 책은 그 비극들을 나의 비극으로 만들어낸 첫 번째 책이다.
나는 밥도 밥그릇도 빼았긴 적이 없다. 하지만 "엄마생각"은 내가 말들을 빼았겼다는 것을 환기시킨다. 너무나도 예쁘고 곱고 쉽고 직관적인 우리 말들. 대기업 입사시험에서 지원자들을 떨어뜨리기 위해 억지로 긁어온 이해할 수 없는 외계어같은 우리말들이 아닌, 생전 처음 듣는데도 단박에 무슨 말인지가 확 와닿는 그런 예쁜 말들.
고향은 옛살라비, 생일은 난날, 세상은 벗나래, 별명은 덧이름, 병은 탈, 욕심은 뚱속, 반찬은 건건이, 기도는 비나리, 적은 부셔, 파도는 몰개, 식구는 입네...
그리고 그 예쁜 말들로 다시 묘사되는 우리의 비극은 생전 처음 맛보는 울림을 안겨준다.
... "통머슴은 제가 낳은 애들의 살고 죽는 목숨까지도 모두 제 것이 아닌 머슴이라는 뜻이거든. 그게 누구냐, 바로 이 땅의 여자 조선의 여자라는 거야. 여자란 태어나면서부터 발이 묶이고 손도 묶이고 목도 묶이고 머리채도 묶이고 웃음도 묶이고 울음도 묶이고 골나기도 묶이고... 엄마는 그 굴레를 찢어팡개치고 질라라비가 되는게 꿈이었어""질라라비라니, 그게 뭐이야""부심아, 닭이란 놈들 말이야, 그놈들을 사람이 잡아다 기르기 앞서서는 닭들도 제 이름이 있었거든. 그것이 무엇인 줄 알가서? 그게 바로 질라라비야.닭은 멋 옛날 사람이 잡아다 기르면서부터 제 이름을 뺴앗겼어. 날짐승인데도 날아다니는 제 짓을 빼앗기고, 제 집을 제가 짓는 제 짓도 빼앗기고, 제 먹거리를 제가 만드는 제 짓도 뺴앗긴거야. 그것 말고도 또 뺴앗겼어. 알을 낳아도 낳는 쪽쪽 사람들한테 다 빼앗기고도 모자라 손님이 오면 목숨까지 뺴앗기잖아. 그렇게 바싹 약이오른 닭들은 마침내 깨우친거야. 어떻게 깨우쳤느냐, 이건 바보짓만이 아니다, 바로 바보보다도 더 못한 멍청이 짓이라고 퍼뜩 깨우친 닭들은 우리 사람의 우리를 짓부수고선 닭들의 옛살라비인 숲으로 날아갔어. 훨훨. 거기서 서로 껴안고 외친거야. 뭐라고 외쳤느냐.'자, 이제부터 우리들은 한이 맺혀도 그 한도 모르던 멍청한 머슴, 닭이 아니다, 이 사람이라는 개새끼들아. 우리들은 우리들의 타고난 이름대로 질라라비, 우리의 뿌리인 질라라비를 되찾았다 이 새끼들아.'그런 질라라비 다시 말하면 진짜 사람이 되는 것이 엄마의 꿈이었어"
194~50년대 한국의 생활상을 증언하는 사료로서, 가난 속에서도 품격을 잃지 않는 고고함을 보여주는 동화로서, 가족과 생이별을 당한 사람의 증언으로서, 그 외 다양한 각도에서 큰 가치를 지닌 책이다. 하지만 나는 오직 예쁜 우리말을 잔뜩 만나볼 수 있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이 책을 사람들이 꼭 읽어볼 만 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