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Duplicate
📗

[서평]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Created
2024/01/30
Tags
Book
Review
Science
Disability
IT
Fiction
Feminism
Literature
Politics
김초엽의 SF 단편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SF라는 장치를 통해 우리 주위에 늘 존재하는 다양한 약자들을 새로운 시선에서 발견하도록 돕는다. 단순히 관점을 미래로, 또는 우주나 심해로 옮겨놓는 것 만으로도, 우리는 기존에 지나치던 다양한 모순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음을 그는 십분 활용한다. 소설을 읽는 내내 새로운 관점을 획득하는 은은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IT 종사자 입장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작품들은 「관내분실」이었다. 거대한 데이터베이스 안에서, 특정 정보에 접근 할 수 있는 "관계"들이 모두 소실되었을 때, 분명 DB안에 존재하는 정보임에도 접근 할 수 없는 상황은 다양한 층위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실무에서도 늘 주의해야 하는 부분이다.
재미있는 점은, 이러한 분실이 때로는 문제이기도, 때로는 해결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예컨대 많은 컴퓨터들은 '모든 관계가 소실된' 데이터를,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데이터라고 판단하고 메모리에서 삭제하는 기재를 가지고 있다. 분명 유한한 용량을 가진 컴퓨터 메모리를 우리가 체감상 무한으로 즐길 수 있는 이유가 대부분 여기서 온다.
그런데 이런 자동 메모리 해제 기능이 동작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바로 어떤 관계가 서로를 순환적으로 참조하는 경우다. 부모가 자식을 참조하고, 자식이 부모를 참조한다면, 이론 상 다른 모든 관계가 끊어져도, 이 둘은 메모리에서 해제되지 않는다. 실무에서는 이렇게 메모리를 계속해서 차지하는 요소들을 최대한 없애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니까, 거꾸로 얘기해서, 우리가 세상에서 최대한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결국 순환참조일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고 이해하고, 기억하는 것. 우리가 조금이라도 쓸모없어졌을 때, 하루 빨리 제거 할 생각밖에 하지 않는 혹독한 세상 속에서, 끝내 뻔뻔하게 버티기 위해선 결국 사랑을 나눠야 한다난 것. 소설 속의 지민이 은하를 결국 기억하고 이해해냈던 것은, 어쩌면 그가 은하처럼, 또는 은하와 함께 관내분실 되지 않기 위한 몸부림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