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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페미니즘의 도전

Created
2019/02/24
Tags
Book
Review
Feminism
Epistemology
페미니즘을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여성이 차별 받지 않는 자유로운 세상을 위해서 우리 모두는 힘을 합쳐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좀 더 나아가 그 과정에서 조금 힘이 들더라도 우리는 참아야 하며 우리의 후손들에게 더 나은 세상을 물려주기 위해 때로는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고도 말한다.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지나갔다고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이데올로기 없이 세상을 인식하는 게 서툴다. "완벽한" 세상이 있고,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우리 모두가 노력해야 한다! 공자도 예수도 맑스도 설파했던 이런 생각은 너무나 직관적이고 매력적이고 그래서 힘 있는 생각이다. 『페미니즘의 도전』은 바로 이런 힘 있는 생각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여성주의는 '일차적인'(우선적인) 사회모순이 존재한다는 사고방식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다. 성별 억압을 전제하지 않은 계급 억압은 없으며, 계급 차별 없는 성차별도 있을 수 없다. 인간의 모든 사회적 억압은 여러 모순이 중첩, 교직 된 것이며 각 개인이 겪는 고통은 역사적, 사회적 맥락에 따라 다르다. - 『페미니즘의 도전』, 123p
책의 1, 2부는 우리 사회 여성에 대한 다양한 억압을 폭로하고, 우리가 억압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이 왜 억압인지를 설명하는 글들이 주를 이룬다. 이런 내용을 새로워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겠지만, 페미니즘에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사실 새롭거나 놀라운 내용은 아니다. 글이 쓰여진 시점이 2003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조금은 시대를 따라오지 못하는 내용들도 더러 있다.
나는 이 책의 백미가 성매매를 보는 다양한 여성주의 관점을 다룬 3부라고 본다. 성매매가 옳다고 보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정확히 성매매의 어떤 부분이 문제인지를 말하는 것은 쉽지 않다. 성매매는 성매매를 원하지 않는 여성들을 그들의 자유의사에 반하여 억지로 행해지기에 잘못된 것인가? 그렇다면 "자발적"으로 성매매를 하는 여성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들은 사실은 자신들이 "자발적"이라고 착각하는, 사실은 포주에 의해 길들여졌을 뿐인 여성들인가? 그런데 그들의 발언이 "자발적"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성판매자들의 목소리를 당사자들의 의사는 무시한채 깔아뭉개는 것은 아닌가? 혹은 거꾸로 성판매자들의 목소리만이 진리이고, 그 목소리에 대한 비판은 "현장의 목소리를" 외면한 엘리트의 자의식 과잉일 뿐인가? 하지만 성판매자들은 보지 못하고 밖에서만 관찰할 수 있는 모습이 있진 않을까?
"남성중심 시각으로만 세상을 보지 말자"는 말은 이해하기 쉽다. 그런데 "여성주의 시각으로 봤을 때 기존 남성중심의 시각이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지"를 밝히는 얘기가 중심이 되다 보면, 아주 많은 사람들은 이 말을 여성주의의 생각이 "맞고" 남성주의 생각이 "틀렸다"는 얘기로 받아들이게 된다. 사실 하고자 하는 얘기는 "여성주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봐 보자"는 것인데 말이다. 따라서 인식론으로서의 여성주의를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남성중심 시각에 대한 비판만으로는 부족하다. 왜냐하면 "누가 맞고 틀리냐를 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다"라는 주장을 할 때, 그 "누가" 중의 한 쪽이 기존의 가해져였던, 혹은 현재 권력을 가진 남성이라면, 그 주장은 기존 가해자에 대한 변호처럼 들리고, 결국 힘을 크게 잃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누가" 중의 양쪽이 모두 여성인 경우에야 비로소 이 주장은 여성들에게 큰 공감을 얻을 수 있다. 『페미니즘의 도전』은 성매매를 바라보는 다양한 여성주의의 입장을 소개하면서 그 다양한 입장들이 서로 어떻게 관계를 맺고 대화를 이어가는지(이어가야 하는지)를 탁월하게 보여준다.
...(중략) 그러나 이러한 이분법적 논의 구도 안에서는 1) 여성주의자와 성판매 여성의 대립은 불가피하며, 2) 여성들 간의 차이는 곧 대화 불능으로 이해되며, 3) 당사자 운동으로서 반성매매운동의 가능성은 모색하기 힘들어진다. 가장 큰 문제는, 성매매 찬반 논쟁을 넘는 다른 방식의 사유와 언어가 없다는 것이다. - 『페미니즘의 도전』, 209p
여성주의자와 성판매 여성의 차이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현실에 의해 정해진다. 여성주의는 공통된 본질과 정체성을 지닌 경험적 집단의 투쟁이 아니라, 여성이라는 범주가 종속적으로 구성되는 복합적 형식에 대한 투쟁이라는 것을 인식한다면, 성매매 역시 다른 방식의 접근을 모색해볼 수 있다. 여성주의자의 입장이나 성판매 여성의 입장이나 모두 '부분적 진실'이고, '상황적 지식'이다. - 『페미니즘의 도전』, 222p
종종 "여성주의"로 대동단결하자는 취지의 논리들이 보인다. 여기에 동의하지 않으면 배신자가 된다. 왜 모두가 코르셋을 거부하고 숏컬을 칠 때 장발을 유지하는지, 왜 모두가 결혼을 거부하고 있을 때 남성과 연애하며 심지어 결혼까지 하는지 그들은 힐난하며 묻는다. 여성의 해방을 말하면서 여성의 삶을 재단하고 틀에 가두는 것이다. 인간해방을 부르짖던 일부 좌파들이 서로를 감시하고 재단하고 때로는 숙청하던 잘못을 어떤 이들은 다시 저지르고 있다. 이데올로기적 사고방식은 그렇게나 매력적인 사고방식인가보다.
『페미니즘의 도전』은 이러한 매력적인 사고방식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이 도전이 끝내 성공 할지 아직은 알 수 없다. 매력적인 사고방식(이데올로기)에 도전하면서 매력적이지 못한 (학술적인) 서술방식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오늘날의 여성운동이 나아갈 방향에 고민하는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참고하고 가야 할 도전이다.